플라타너스와 전봇대와 새 - 김요아킴
플라타너스와 전봇대와 새 - 김요아킴
떠돌이 새 한 마리 날아와
검은 그림자 속으로 제 몸을 추락시킨다
벌써 몇 번째이던가
오늘도 어김없이 김씨의 마음버스가
잦은 기침을 내뱉는 시장(市場) 사거리 부근
실뿌리마저 흙 속에서 키워 올린 기둥 하나가
너무도 단단히 박혀 오른 그림자들과 나란히
서로의 키를 넘보기에 여념 없는데
살랑살랑 햇빛에 말려놓을 여린 가지 하나 없이
오로지 옆자리 매끈한 족속과의 튼튼한 연대를 위해
시커먼 줄, 활시위 마냥 당겨 놓고는
세속도시의 욕망만큼이나 짜릿함을 즐기는 그 틈 사이로
결코 물 없인 살 수 없는 곰보나무 하나
상처 난 제 생을 넓디넓은 잎으로
겁없이 감추려다 그만, 서걱서걱
전지가위의 재빠른 동작에 하얀 그림자로 내팽개쳐지고
여전히 검은 그림자는 꿈쩍하지 않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또 한 구의 시신을 받아내고 있을 뿐이다
*시집, 어느 詩낭송, 푸른별
美柳나무* 그늘에 서다 - 김요아킴
무더운 매미소리를 짙은 그늘로 덮어버리며
일찌감치 기지개를 켠 美柳나무는
오늘도 교무실 창 밖에서 서성거린다
유일하게 교정을 내려다보며
벌써 내 앉은 눈높이에, 한번 더
바뀐 강산의 자리만큼 훌쩍 하늘을 이고
자잘히 매달린 잎사귀들이 길어 올리는 파도소리
편안히 그여 가는 나이테를 스윽 훑고 지나면
밑동으로 흘러내린 새콤한 바람을
아이스크림 빨듯 총총히 다가앉은 아이들
그 한가로운 재잘거림에, 얼마 전
안심하고 둥지를 틀어온 잿비둘기 한 쌍이
묵혀 왔던 비밀 하나를 '툭' 떨어뜨려 놓는다
이제껏 몸 비벼왔던 이 그늘 우리 것이 아니라며,
큰 바다 건너 빌려온 것이라고,
너무도 이 땅에 잘 자라주어 잠시 숨겨왔을 뿐이라며,
날지 못할 체중만큼의 비장함으로
한 점 한 점 파리한 모국어로
마치 제 살붙이에 전해주는 유언처럼
길게 도열한 그 그림자 속
현대사의 아픈 한 페이지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미국이 원산지인 버드나무과 낙엽교목으로 미국에서 들어온 나무라 해서 미류(美柳)나무라고도 함.
#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이때까지 시인은 본명인 김재홍으로 시집을 냈다. 세 번째 시집부터 김요아킴이라는 필명을 쓰는데 동명의 시인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필명을 쓰는 사연은 다양할 테지만 뒤늦게 이름을 바꾼 이런 경우는 좀 쓸쓸하다. 서정성 짙은 회화적인 시가 옛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무더위가 시작된 요즘 시 읽기 좋은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