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영화 상영관 - 이성배
흑백영화 상영관 - 이성배
폭설, 눈이 녹을 때까지
산짐승들과 사람이 길을 같이 쓴다.
식구들 많아 오가는 손님들로 마당까지 환하던 우물 옆 감나뭇집,
빈 집들 사이에서 감나뭇집 할머니 혼자
밤새 낡은 흑백 영화를 튼다.
지붕마다 두툼하게 광목 이불을 덮고 가로등은 서넛, 고라니가
꼭대깃집 헛간 처마에 늘어진 시래기를 뜯는다.
어두침침한 안방 벽에 걸린 빛바랜 가족사진-영화포스터, 함께 찍힌
햇볕은 아직도 고슬고슬하다.
밤새 함박눈은 그치지 않고
쩡 하고 무쇠 솥을 열자 하얀 김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부엌 밖으로 쏟아져 오른다.
*시집, 희망 수리 중, 고두미
밤의 거푸집 - 이성배
가장 반짝이는 순간을 담은 액자 하나쯤 걸어보려 했다면
잘못 박힌 못 되돌리기 지난하다는 걸 안다.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 하릴없이 기웃거려 본 사람이라면, 이미
법(法)이라는 게 물 흐르는 데로 가는 것이 아님을 안다.
돈 줄 사람은 법대로 하라고 핏대를 높이고
배고파 찾아간 사람은 자꾸 밥이라고 사정하다가
까맣게 죽은 손톱 속에 식구들 얼굴이 비쳤겠지 그래,
법인지 밥인지 잘못 박힌 못대가리 어금니로 꽉 깨물고 뒤로 버팅겨 보자
현장 사무실은 박살이 나고 이것은
법의 유발형 함정이 아닌지 강력한 의구심이 든다.
먹고사는 게 갑골문자라 말해주는 밥의 거푸집들,
노동이 노동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합법적 도구는
몸뚱이 하나.
식구들과 따듯한 밥 먹다가 그냥 서로 쳐다보기만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는 순간을,
바람벽에
가족사진 하나 걸어 두는 일 지난하다.
# 이성배 시인은 1973년 충북 괴산 출생으로 충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9년 경찰관이 되어 현재 음성 한 파출소에 근무하고 있는 경찰이다. <희망 수리 중>이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