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흑백영화 상영관 - 이성배

마루안 2019. 7. 10. 19:42

 

 

흑백영화 상영관 - 이성배

 

 

폭설, 눈이 녹을 때까지

산짐승들과 사람이 길을 같이 쓴다.

 

식구들 많아 오가는 손님들로 마당까지 환하던 우물 옆 감나뭇집,

빈 집들 사이에서 감나뭇집 할머니 혼자

밤새 낡은 흑백 영화를 튼다.

 

지붕마다 두툼하게 광목 이불을 덮고 가로등은 서넛, 고라니가

꼭대깃집 헛간 처마에 늘어진 시래기를 뜯는다.

 

어두침침한 안방 벽에 걸린 빛바랜 가족사진-영화포스터, 함께 찍힌

햇볕은 아직도 고슬고슬하다.

 

밤새 함박눈은 그치지 않고

쩡 하고 무쇠 솥을 열자 하얀 김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부엌 밖으로 쏟아져 오른다.

 

 

*시집, 희망 수리 중, 고두미

 

 

 

 

 

 

밤의 거푸집 - 이성배

 

 

가장 반짝이는 순간을 담은 액자 하나쯤 걸어보려 했다면

잘못 박힌 못 되돌리기 지난하다는 걸 안다.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 하릴없이 기웃거려 본 사람이라면, 이미

법(法)이라는 게 물 흐르는 데로 가는 것이 아님을 안다.

 

돈 줄 사람은 법대로 하라고 핏대를 높이고

배고파 찾아간 사람은 자꾸 밥이라고 사정하다가

까맣게 죽은 손톱 속에 식구들 얼굴이 비쳤겠지 그래,

법인지 밥인지 잘못 박힌 못대가리 어금니로 꽉 깨물고 뒤로 버팅겨 보자

현장 사무실은 박살이 나고 이것은

법의 유발형 함정이 아닌지 강력한 의구심이 든다.

 

먹고사는 게 갑골문자라 말해주는 밥의 거푸집들,

노동이 노동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합법적 도구는

몸뚱이 하나.

식구들과 따듯한 밥 먹다가 그냥 서로 쳐다보기만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는 순간을,

 

바람벽에

가족사진 하나 걸어 두는 일 지난하다.

 

 

 

 

# 이성배 시인은 1973년 충북 괴산 출생으로 충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9년 경찰관이 되어 현재 음성 한 파출소에 근무하고 있는 경찰이다. <희망 수리 중>이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