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무도 아무도를 부르지 않았다 - 이현호

마루안 2019. 7. 3. 22:05



아무도 아무도를 부르지 않았다 - 이현호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의 지옥이 있어."
귀밑머리를 쓸어올리듯이 네가 말했을 때
아름다운 네 앞에 서면 늘 지옥을 걷는 기분이니까
그 어둠 속에서 백기같이 흔들리며 나는 이미
어디론가 투항하고 있었다


네 손금 위에 아무것도 놓아줄 게 없어서
손을 꼭 쥐는 법밖에는 몰랐지만
신이 갖고 놀다 버린 고장난 장난감 같은 세상에서
퍼즐처럼 우리는 몸이 맞는다고 믿었었고
언제까지나


우리는 서로에게 불시착하기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우리가 비는 것은 우리에게 비어 있는 것뿐이었다
삶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나? 습관
우리는 살아 있다는 습관
살아 있어서 계속 덧나는 것들 앞에서
삶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나? 불행
그것마저 행복에 대한 가난이었다


통곡하던 사람이 잠시 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를 때
그는 우는 것일까 살려는 것일까
울음은 울음답고 사랑은 사랑답고 싶었는데
삶은 어느 날에도 삶적이었을 뿐


너무 미안해서 아무 말 않고 떠났으면서
너무 미안하다 말하려 너를 서성이는 오늘 같은 지난날
아름다운 너를 돌아서면 언제까지나 지옥을 걷는 기분이니까
조난자가 옷가지를 찢어 만든 깃발처럼 그 어두움 속에서 펄럭거리며 나는 벌써
무조건항복 하고 있다, 추억을 멈추고 잠시 삶을 고른다


아무도 아무도를 부르지 않아서
아무 일도 없었다, 지옥과 지옥은



*시집,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 문학동네








양들의 침묵 - 이현호



그대가 풀어놓은 양들이 나의 여름 속에서 풀을 뜯는 동안은
삶을 잠시 용서할 수 있어 좋았다


기대어 앉은 눈빛이 지평선 끝까지 말을 달리고
그 눈길을 거슬러오는 오렌지빛으로 물들던 자리에서는


잠시 인생을 아껴도 괜찮았다 그대랑 있으면


그러나 지금은 올 것이 온 시간
꼬리가 긴 휘파람만을 방목해야 하는 계절


주인 잃은 고백들을 들개처럼 뒤로하고
다시 푸르고 억센 풀들을 어떻게 마음밭에 길러야 한다


우리는 벌써 몇 번의 여름과 겨울을 지나며


두 발로 닿을 수 있는 가장 멀리까지
네 발 달린 마음으로 갔었지


살기 위해 낯선 곳으로
양들이 풀을 다 뜯으면 유목민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는다


지금은 올 것이 오는 시간
양의 털이 자라고 뿔이 단단해지는 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