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처럼 - 서화성
랭보처럼 - 서화성
방금 사우나에서 나온 것처럼
이럴 때면 랭보처럼 기차게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막바지 가을에 별이 떨어진다는 건
두 번째 단추를 갖고 싶다던 그녀는
사랑만 먹고 싶다며 집시처럼 떠돌았다
새벽은 가고 또 다른 새벽이 온다며
방황과 찢어진 가슴에서 청춘은 가버렸지만
앵무새처럼 달력에서 하루가 지나갔다
노동의 힘은 무중력이다, 라는 사실
해질 무렵, 가을을 토해낸 낙엽들이 무덤처럼 잠들었다
낙엽비가 내린 새벽길에서 울어 본 적이 있었던가
손톱이 자라 살덩어리를 파먹어버린 오늘밤처럼
낙엽비를 닮아 서러운 아버지가 생각난다
연탄처럼 속이 타들어갔던
10월의 마지막 밤처럼 그녀는 한 달째 노래를 부른다
유독, 눈물이 짠 12월은 나이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시집/ 언제나 타인처럼/ 시와사상사
돈의 노예 - 서화성
건전지를 갈고 시한부처럼 몸무게를 달았다
소원을 들어준다던 요술램프에서 고기 한 덩이가 떨어졌다
그것은 누구의 허락이나 출생신고가 없이 말이다
며칠째 배가 꺼진 초승달과
며칠째 다락방과 싸웠던 몸무게에서
요즘 같은 불경기에 하늘을 본다는 것이 이 난리다
아니면 사막에서 찾던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든가,
아니면 자글자글 익어가는 수박처럼 불꽃이 핀다든가,
싸고 그리고 맛있다는 그 집 앞에서 신호는 빨갛게 멈춘다
물거품이다. 순간, 지갑과 몸무게는 바람처럼 빠졌다
오백 원짜리 단팥빵과 보리차와 즐거웠던 한때를,
밥상에 강된장을 풀고 몸무게를 달고 지니를 부른다
한때는 인연이라던 그것은 손톱만큼 진동이 없었다
입추가 지난 지 오래다
섭씨 30도에 집나간 며느리처럼 몸무게를 달았으며
여전히 지니는 없었고 여전히 그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문제투성이처럼 반쪽이 되어버린 나,
내 반쪽을 찾는다면 그 집 앞에서 찾을 수 있을까.
# 서화성 시인은 경남 고성 출생으로 2001년 <시와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버지를 닮았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