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별에서 속삭임은 어느 쪽에 많을까 - 안태현
이 별에서 속삭임은 어느 쪽에 많을까 - 안태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별이 있었다
나는 모른다
이 별과 이 별 이후의 세계를
갈라파고스에 가고 싶어 그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왼쪽이었는지 오른쪽이었는지
의자에 앉은 채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이 별을 다 잃은 뒤에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려는 사람 같았다
나도 이 별에서 무엇이든 바꿔보고 싶을 때가 있다
낮과 밤을
빗방울과 핏방울을
천사와 악마를
서로 마주 보는 것들에게는
농담도 있고 질투도 있고 진심도 있을 텐데 속삭임은 어느 쪽에 많은 것일까
나는 그만 속삭임 때문에 태어난 게 분명하다
도무지 깨지지 않는 이 별에서
나름대로 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나의 귀에 도사린 수많은 속삭임 때문
달콤하고 한 발짝 더 빠른 곳에서 시작되는
이 별의 속삭임이여
*시집, 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 시로여는세상
하마터면 - 안태현
그렇다
당신은 고비를 넘겼다고 말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거꾸로 서고
모조품 같은 세계의 균열을 틈타 미사일을 쏘거나 지중해에서 보트가 뒤집혔으니
그건 먼 이야기
달리는 버스에 사다리가 뛰어들고 멀쩡한 정신으로 욕실에서 미끄러지는 일도 다반사다
놀랍지 않은가
하마터면
하고, 가슴을 쓸어내릴 손이 있다는 것
그로부터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다른 당신이 오고
압력솥에서 갓 지은 밥을 퍼서 함께 먹을 수 있다니
나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할 때 아무렴요 당신은 정말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하마터면
아무것도 눈치를 못 채고
그 복을 돌멩이처럼 차버렸을지 모르지요
나는 어쩐지 늘 한 발을 크고 작은 고비에 걸쳐두고 있는 기분인데 당신이 잡아주겠습니까
병을 만지고
죄를 짓고
죽은 자들을 가슴에 묻지 못하는
폐허 같은 내 손을
# 안태현 시인은 전남 함평 출생으로 2011년 <시안>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달의 신간>, <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