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팔꽃 담장 - 박형권

마루안 2019. 6. 15. 19:27

 

 

나팔꽃 담장 - 박형권

 

 

외치기 위해서 속을 보여야 하는 꽃 있다

담장 높고 창살 꽂고 철망 친 그 집에

고요한 외침 있다

대문이 닫힌 빨간 벽돌집에는

근처에만 가도 컹컹 개 짖는 소리가 귀청을 물어뜯는다

삐익삐익 방범 벨도 짖는다

저러고도 편안한가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하는 그 집에

나팔꽃 나팔꽃 산사태처럼 피었다

머뭇머뭇 터질 듯 피었다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나팔꽃 뇌관처럼 아찔하다

나팔꽃 보면 저 집 초인종 누르고 싶지만

날카로운 말에 찔릴지도 몰라 문 앞에서 기웃거리다

길고양이도 피해갔다

여름 한철 다 지나도록 빨간 벽돌집은

굳건히 닫혀 있다

나팔꽃 저렇게 피워올릴 줄 아는 사람들이

우리 시선이 찔려 눈 아린 걸 보지 못한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은 있어 나팔꽃 철망 위로 선뜻 올려 놓았다

볼이 빨간 그 아가씨가 올려놓았다

외치다 쓰러지는 꽃 있다

외친다는 것은

목젖가지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

울컥할 때까지 당신을 사랑해보는 것

이 여름의 끝이 가을이 아니라 절망일지라도

나팔꽃 나팔꽃 시들어갈지라도

흔쾌히 시드는 법 아는 꽃

그 집에 있다

 

 

*시집, 전당포는 항구나, 창비

 

 

 

 

 

 

직박구리들의 서울 - 박형권

 

 

집 밥이 먹고 싶은 한 사내가

밤새 낯선 입술에 넋두리를 적어놓고

모텔 문을 열고 나온 뒤

슬픔슬픔 직박구리들이 돌아오지

십만원에 훌쩍훌쩍 우는 여름밤이 허공을 열어 허공을 조여줄 때

모두 휴가 가고 이 서울이 비어 있었다는 거

자칫 고독에 눌려 죽을 뻔했다는 거

아무도 모르지

멋모르고 사는 것이 서울을 지켜주는 거라는 거

아무도 모르지

푸석푸석 부은 눈과 두툼한 허기로 새벽이 총총걸음을 걷고

직박구리들과 슬그머니 합류하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필요는 없지만

 

아빠

무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