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제비꽃이라는 이름의 불면 - 손현숙

마루안 2019. 5. 10. 23:10



제비꽃이라는 이름의 불면 - 손현숙



불면, 나는 그것을 제비꽃이라 부른다
내 속의 불꽃!
척박한 땅에서 피어나는 파란 꽃
잠들지 못하는 날
눈동자는 광기를 담아 새파랗게 발광하기도 한다
마치 밤에도 심지를 돋아 불을 당기는 신의 장난질처럼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어디 먼 곳을 향해 간다
팔, 다리, 손바닥, 팔꿈치, 무릎, 가슴과 배를 땅바닥에 매치는 것도 모자라서 이마를 땅에 찧으며 오체투지하듯,
종종, 캄캄 중에 갇히기도 한다


폭 넓게 생각하면 생존은 비극!
누구나의 생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작고 초라하다
말없이 펼쳐지는 어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 버리기도 한다
결국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일까
그래서 도착하면 또 그곳은 먹고 입고 싸고 잠들지 않아도 좋은 곳일까
이곳에서는 그곳을 향해 가고, 또 그곳에서는 또 다른 곳을 향해 가야 하는,

혹시 삶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형벌 같은 것은 아닐까
불면을 옆구리에 끼고 까무룩 한 밤을 건너다 보면
무섭다
시, 제비꽃이다
우주의 중심을 한 바퀴 돌아 그만, 오늘이 순례의 끝이기를...



*시집, 손, 문학세계사








팬티와 빤쓰 - 손현숙



외출을 할 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우선 빤쓰부터 벗어야 한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지만, 편안하지만,
그래서 빤쓰지만...


집구석용 푸르댕댕 빤쓰는 벗어버리고
레이스팬티로 갈아입어야 한다
앙증맞고 맛있는 꽃무늬팬티 두 다리에 살살 끼우면
약간 마음이 간지럽고 살이 나풀댄다
나는 다시 우아하고 예쁜 레이스공주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땡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쎄콤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유명 라펠라 팬티로 단단한 무장을 한다


오늘 바람이라도 살랑, 불라치면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나, 죽어도 꽃무늬레이스로 들키고 싶다






# 손현숙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고려대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너를 훔친다>, <손>이 있다. 2002년, 2005년 문예진흥기금, 2010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2015년 경기문화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