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날의 무직 - 정와연

마루안 2019. 5. 9. 22:25



봄날의 무직 - 정와연



바쁜 꽃들,
 

봄은 들판부터 좁은 보도블록 틈까지 공휴일이 없다 오래전 폐업한 인력 사무소 잠긴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이 동네 사람들이 아닌 허겁지겁 도착한 겨울의 옷차림들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잠깐 비틀었을 뿐인데 단단하게 잠긴 문 그와 반대로 잠깐 틀었을 뿐인데 한껏 열리는 봄 오늘, 저 문을 열려고 했던 뒤늦은 겨울옷의 사람들이 공친 날이다


어느 쪽이 봄입니까
어눌한 말투로 물어보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봄날의 무직은 서글프다 지구는, 계절은 잠깐 그 각도를 틀었을 뿐이데 열리고 또 닫힌다 굳게 닫힌 저 문의 열쇠를 살짝 틀어놓고 싶은 봄날 가끔은 요지부동의 순간이 있다


꽁꽁 언 수도꼭지는 마중물 같은 뜨끈한 물이 필요한 것처럼, 제 손끼리 비벼가며 녹이는 두 손등처럼 봄의 가운데 잠긴 문이 있고 열쇠는 또 어느 폐업의 상실 속에서 녹슬어 갈까


굳이 나를 꼬집지 않아도 아픈 봄은 있다



*시집, 네팔상회, 천년의시작








느닷없는 주소들 - 정와연



느닷없는 주소에서
느닷없는 물건을 배달 받을 때
내가 한 번도 적어본 적 없는 그 주소엔
비릿한 건조들이 들어있었다


늘 다니던 산책길 옆으로
느닷없는 죽음 묻혔다
어느 날 느닷없이 길에서
길 밖으로 밀려났을 것이다


살아있어도 죽었어도
주소는 있다
방위를 챙기고
남향만 고집한 주소들마다
파릇한 초록이 비좁다


문득, 나보다 내 주소들이
더 많은 관계들로 북적인다는 생각이 든다


내 휴대폰을 두드리는 사람들
돈을 빌려주겠다
좋은 땅 싼 값에 주겠다
인질로 잡혀 있다는
가짜 아들의 울음소리까지


이젠 느닷없는 일들이
느닷없지 않다
낯선 얼굴이나 번호는 뚝 끊어버리는
습관 하나 더 생겼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