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 가장 약한 깃발 - 박연준
마루안
2019. 5. 7. 19:27
꽃, 가장 약한 깃발 - 박연준
봉오리를 열다 좁히다 망설이는 사이
어둠을 빌미로 놓친 사랑이 몇개
들여다보려다 그만 코가 다치네
향기에 엉켜 눈이 머네
손등 하나 볼 언저리에 머물다 시들고
내가 당신-이라 부르던 사내는,
들은, 죄다 남의 남자가 되었다
이렇게 깊은데 당신은 왜 시작하지 않을까
종은 계속 울리는데
모르고 핀 꽃들은
들개의 축축한 주둥이에 물려
사라지거라
*시집, 베누스 푸디카, 창비
술래는 슬픔을 포기하면 안된다 - 박연준
탈탈 털어 죄다 갖다 버린 그늘에는
무릎에서 떨어진 딱지도 있고
취한 아버지가 내 이름을 오래 부르다 고꾸라져 잠든 밤도 있고
뒤틀린 다리를 끌고 사라지던 여름도 있다
뭉뚝한 연필, 가느다란 연필, 부러진 연필로
새벽의 어깨선을 열심히 그리던 시간들도 모두
모두 갖다 버렸다
버렸더니 살겠다
내가 나를 연기하며
(시도 쓰는 게 아니라 쓰는 연기를 하며)
그늘을 기억하는 일과
들어가 사는 일 사이에서 도르래를 굴리며
살 수는 있겠으나
이미 태어난 슬픔은 악다구니를 피해
여전히 질투 나게 말랑한 누군가의 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붉고 끈던지게 새끼를 치고
나는 멀리에서 가벼워진 몸,
이라 생각하며
포기, 포기, 포기하겠다고 눈을 감지만
어느 새벽 방바닥에 앉아 발가락을 만져보니
열개의 잘린 술래들,
벙어리가 되어 입을 벙긋거리는 술래들이 나를 본다
도망가봤자 소용없어,
아름다운 그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