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열흘 - 김종해
봄날 열흘 - 김종해
슬픈 일 하나에 깊이 빠져서
누구나 어둠 속에 갇힐 때가 있다
세상이 어두워 캄캄할 때가 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세상
천지에 봄날이 와도 봄날 같지 않구나
그런 날 어둠 속에서 꿈꾸듯
아침 유리창 햇살을 걷어 올리면
슬픔이 있던 자리
아! 거기, 눈부신 봄날
창밖은 수천의 환호하는 꽃잎들이
나 보란 듯이
반짝반짝 빛난다
벚꽃이 피고 지는 봄날 열흘 동안
바람은 불고
조도(照度) 30촉의 분홍 꽃잎들이
하늘에서 사방으로 흩날린다
더러는 내게로 와서 나를 깨우는
봄날의 꽃잎
슬픈 날을 지우는 꽃잎도 있다
*시집, 모두 허공이야, 북레시피
기도를 커닝하다 - 김종해
친순이 다 된 아들과
구순이 지난 어머니가
오장동 함흥냉면집에 와서
회냉면을 먹는다
두 모자(母子)가 회냉면을 먹기 전에
하느님께 올리는 감사 기도
일생 위에 올린 은혜로움이
회냉면 사발 위에 얹혀 있다
엄마, 맛있어? 칠순의 아들이 말하고
응, 구순의 어머니가 대답한다
나는 모자의 정겨운 대화를
옆자리에서 다 듣는다
감사 기도를 할 때에도
나도 뒤따라 짧게,
'저 모자의 기도와 함께합니다'
감사 기도를 커닝하는 내 모습을
하느님은 일부러 모른 척하신다
흐트러진 손님들의 신발을 정돈하시던 하느님.
입안이 뜨겁고 매운
한 사발의 회냉면을 비우고 나서
나는 먹는다는 것의 은혜로움을
육수를 마시듯
몸속에서 따뜻하게 마무리한다
아아, 문밖에도 빗속에 서 계시는 하느님!
# 김종해 시인은 1941년 부산 출생으로 1963년 <자유문학>과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인간의 악기>, <신의 열쇠>, <왜 아니 오시나요>, <천노, 일어서다>, <항해일지>,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별똥별>, <풀>, <봄꿈을 꾸며>, <눈송이는 나의 角을 지운다>, <모두 허공이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