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벚나무 탈출기 - 신정민

마루안 2019. 4. 12. 22:25



벚나무 탈출기 - 신정민



끝장난 연애편지를 찢고 또 찢어서

더 이상 찢을 수 없을 때까지 찢어서 뿌린다


분홍빛 뺨을 가진 꽃잎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읽을 수 없는 사랑은 흑색선전


사랑하는 자와 사랑을 외면한 자가 주고받은 편지

거리의 어떤 것과도 경계를 갖지 않고 흩날린다

불온한 간판 위에 떨어지고

달리는 바퀴를 쫓아가기도 한다


봄은 반복되고

끝나지 않은 벚나무 연애사는

삐라가 되어 4월을 장식한다


널 사랑한다

너도 날 사랑해야 한다

은밀한 폭력이 피었다 진다



*시집, 뱀이 된 피아노, 천년의시작








본적 - 신정민



나의 본적은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아버지가 태어난 곳


오리온 좌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

이력서 첫 칸에 쓴다

태생보다 더한 이력은 없으므로

남은 빈 칸들을 채우지 않기로 한다

한 줄 쓰고 멈춘 나의 배후


아버지의 머릿속 실핏줄이 터졌을 때

엑스레이 사진 속에서 나는 한 점, 

검게 빛나는 은하계를 본 적 있다

연필심 끝으로 찍어 놓은 제우스의 태생지


아버지는 주파수를 잡지 않은 라디오를 켜 놓고 주무셨다

직직거리는 소음은 우주 먼 곳에서 타전 되어 오는 아버지의 모국어

너무 늦은 기별이어서 지나쳐 버린 약속들

방송이 끝난 티비를 켜 놓고 주무셨던 것도

화면 속 흑백의 언어들을 듣고 계셨던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꺼 놓고 나온 밤들이 많았다


눈물 많은 아버지,

한밤중에 오래도록 하늘을 바라보셨던 이유를 이제야 알다니






# 신정민 시인은 1961년 전북 전주 출생으로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꽃들이 딸꾹>, <뱀이 된 피아노>, <티벳 만행>, <나이지라아의 모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