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 정창준
다시, 봄 - 정창준
버드 워칭도 하기 전에 계절은 파하고
가임기의 나무들만이
맑고 투명한 수액을 끌어올려
몸을 뒤틀어 난산하는 숲 속,
축축한 안개 너머로
비릿한 새순을 토해 내는 저녁 내내,
젖은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섰지.
차고 깊은 허공 속으로
따뜻한 입김을 낼 수 없는 아이들이
너울 같은 바람에
육신 없이 일렁거릴 때 꽃샘추위라고,
곧 물러날 거라고 거짓말을
귓전에 대고 속삭여 주었지.
신음처럼 바람이 불고
사랑한다는 말이 내 귓전에 닿을 때
망각은 죄라고,
눈물이 알리바이가 되어선 안 된다고
검은 입술로 너는 답해 주었지.
개별적 슬픔은 허용하지만
추모는 금지하는 이 세상이 너무 차구나.
구석구석 슬픔이구나.
선실로 덜컥 넘쳐 들어오는 물살을 피해
유리창에 달라붙던 손바닥처럼
지금도 그저,
멀게 멀게 별들이 뜨고
가야 할 때를 놓친 새 몇 마리
습하고 오그라든 몸으로
어둠 속에 침몰하는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있다.
손 닿지 않는
컴컴한 지층 속에서
점점 화석이 되어 가는 유골들.
*시집, 아름다운 자, 파란출판사
울기엔 좀 애매한* - 정창준
연애의 계약기간 역시
좀처럼 연장되지 않았다.
쉽게 해고를 통보 받았고
쉽게 수긍했다.
사랑에서조차 나에게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자리만 허락되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라는 위안은
반복될수록 서글펐다.
흔한 이별 방식이었고
번번이 슬펐지만
언제나 울기엔 좀 애매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했지만
입사 면접만큼 까다롭거나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만큼 모호했다.
가지지 못한 것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서로 같았기 때문이다.
간혹 만나고 싶은 여자도 있었지만
인터넷 쇼핑몰의 카트에
오랫동안 담겨 있다가 자동으로 삭제되는
다른 물건들처럼 곧 지워졌다.
어차피 내게는
선망할 수 있는 권리만 허락되어 왔으므로 익숙했다.
간혹 만남이 이어지는 여자도 있었다.
주로 호기심의 수명이 길거나
겪고 나서 알아 가는 유형의 사람들이었다.
기념일이 오기 전에 끝나야 하는 연애였지만
어쩌다 기념일을 지나게 되면
반드시 끝났다. 카드명세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써 넣을 곳이 별로 없는 계약서처럼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 그러나,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 동화가 있다지.
제 조각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이 빠진 동그라미의 이야기.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잘못 재단된 퍼즐이었다.
얼마 사귀지 못한 여자 친구의 청첩장이나
친구의 부고에 이미 익숙해졌다.
세상은 나를
지독한 노력과 고용불안이
혼인신고도 없이 낳은 사생아로 정의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오늘도 억지로 세상에 몸을 밀어 넣으며
어쩌면 오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라고 중얼거리다 습관처럼 휴대전화를 더듬어,
울기 전에, 서둘러 새긴다.
이것또한지나가리라.
*울기엔 좀 애매한: 만화가 최규석의 작품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