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악연, 그 얼음의 불 - 이원규
마루안
2019. 3. 23. 21:09
악연, 그 얼음의 불 - 이원규
쩡쩡 얼음장이 갈라지는
강변에 서서
귀싸대기를 후려치는 북풍한설을 맞는다
그래, 그래
악연이란 잘못된 만남이 아니라
한 하늘 아래 살면서
아예 만나지도 못하는 것
소중한 인연 망쳐놓고
서로 삿대질만 해댔다
그래, 그래
이제 와 생각커니
얼음으로 불을 지필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얼음으로 돋보기를 만들어
태양에 비추는 것
그것만이 악연을 넘어서는
도참비기
날마다 태앙은 떠오르나니
프라이팬 위의
토종 달걀처럼 떠오르나니
얼얼하도록 귀싸대기를 맞으며
영하의 심장을 갈고 갈아
얼음 돋보기를 만든다
*시집, 옛 애인의 집, 솔출판사
단풍의 이유 - 이원규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쌍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