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 - 백무산
허기 - 백무산
내려가는 지하 계단
수백명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모두 번제물을 받아든 듯 스테인리스 그릇 하나에 두 손 모으고
정성스레 벽을 향해 걸어가 언 바닥을 깔고 앉는다
지상을 받치는 큰 지하 기둥 앞에는 잘 차려입은
한 여자가 찬송가를 이어서 부르고 있다
따로 담지 않고 밥과 국과 반찬이 뒤섞인 짬밥 그릇에
경전 암송하듯 고개를 처박고
바쁘게 입을 놀리고 있다
국을 퍼담는 사람들 눈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허기만 보인다
밥을 퍼담고 반찬을 담는 사람들 눈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허기만 보인다
찬송을 부르는 여자는 지나가는 행인들 눈에나 보일 뿐
허기진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행인들 눈에도 저들이 보이지 않는다
순종하고 무릎 꿇는 것은 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베푼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밥 퍼주는 사람들도 허기져 있다
찬송가 부른 여자도 허기져 있다
모두가 자기 허기를 경배하고 있다
허기진 자기 사랑에 열중하고 있다
허기만 때우면 된다
허기 종교다
허기 종단의 부흥회다
*시집, 거대한 일상, 창비
저지대 - 백무산
처마 아래 벌집을 떼어달라지만
저 죄 없이 거꾸로 매달린 집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까맣게 몰려올 천적들의 손에
흔적조차 없이 지워질 것이다
저도 함부로 이곳에 집을 정하진 않았으리라
비바람 햇살 들고 나는 길 살피고
천적들 피할 길 다 살피고 몇날을
몰래 숨어 다른 위험도 다 살폈을 것이다
무가지 광고에 벼룩시장에 실려서 왔지만
저지대라고 다리 힘 풀린 사람들 구정물처럼
미끄러져 흘러온 건 아니다
종일 햇살이 들지는 않지만
살필 건 그래도 살피고 따질 건 따지고
만료일이 따로 없긴 하지만 계약서 쓸 건 쓰고
잡은 직장들도 예전보다 버젓하다
저 집이 위험하다고 하지만
해코지만 않으면 저들의 길이 대개
사람의 길과 달라 한집에서도 겹칠 것 없고
태양 하나면 모자랄 것 없건만 종일 그늘만 들고
비는 넘치게 오지 않아도 해마다 침수되는 저지대
옆동네 고층아파트 철제담장 위에 새로 철조망 올리고
통하는 길도 지운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높은 데서 보면 낮은 것들은 다 거꾸로 매달렸다
떼어달라고 한다
햇살도 분배받지 못한 저지대
언제 신용불량 딱지가 날아들지 언제 강제수용
집달관을 보낼지 그게 더 급한 저지대
이곳이라고 그저 빗물처럼 흘러들어온 것 아니다
높은 데서 보면 낮은 것은 다 불구처럼 보인다
떼어달라고 한다
거꾸로 매달린 불구의 이 마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