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이 지고 나면 - 김태형
동백이 지고 나면 - 김태형
빈 바람 투망에 소금주머니를 달고 서 있던
언 땅에 키 작은 동백나무 몇 그루
비릿한 갯바람에 소복이 눈 맞고 서서
한껏 피었다가는 못내 뭉텅뭉텅 쓰린 제 붉은 목 떨어뜨리는
그때가 비로소 너의 절정이라는 걸
제 슬픔에 겨워 저리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걸
바닥치기로 떨어뜨린 목 고이 눈감은 채
나를 증명하려고 오지는 않았다
짐짓 모르는 척 뒷길 누구네 집 담장을 끼고 돌아
지는 해거름에 바다를 굽어본다
그렇게 나도 여기 오래 있지는 않으련다
제 몸을 쳐서 겨운 고개 다시 치켜드는 너를 두고
다들 한 자락 해풍에 소리를 다듬다 갈 것이다
그렇게 뒤늦어서야 자지러질 테지만
목청을 높여 피를 한 주먹 토해내도 소용없이
목을 더럽혀 갈기갈기 죄 찢어내고서야
두 눈 물컹하니 시린 뭇 별들을 헤아릴 뿐
천 번을 더 그렇게 네 삶을 던져둘 것이어서
소금 바람이 할퀸 자리가 더 푸르다
무엇을 얻으려는 게 아니라 그게 너의 전부라는 것을
그리하여 삶은 이다지도 깊고 소란스러운 것을
*시집,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문학동네
깨진 거울을 따라 이르는 길 - 김태형
-Mirror Site
그 옛날 나를 부르던 목소리들은 내 안에서 나를 지워가고
나를 비추어내던 그 부재를 통해서만 나의 심장은
유황의 등불로 서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느새 날이 어두웠지만 푸른 허공 위의 빈집에
그곳까지 작은 두레박을 이고 올라갔다
양방향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달이 둥글게 떠오를 때면
물밑에 가라앉은 거울이 맑게 출렁였지만
그토록 딱딱한 수은의 표면으로 곧 깨져버릴 듯이
검은 달의 저 깊은 아래로만 내려가고 있었다
수천의 검은 혓바닥을 삼킨 마른 불꽃의 강 마이안드로스
왼쪽으로 흐르는가 하면 저쪽으로도 흐르는
그리하여 제 중심을 향해 거침없이 자신을 거슬러오르고
불꽃이 막 사그라질 무렵의 잿더미 같은 푸른 문자들
소음으로 가득한 먼지의 성층권을 이루어
수은의 강줄기는 처음으로 되돌아 다시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 안의 푸른 허공을 밀어내어 점점 작아져 사라지는 듯
무수히 서로 비추어내는 검은 거울의 조각들
물 밑에 떠오르던 흰 달을 되돌아보자 이내 가라앉기 시작했다
깨진 거울의 회로를 따라 더 멀리 거슬러올라갔다
나는 내가 온 곳으로 그 어둔 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