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공동 목욕 - 이원규

마루안 2019. 3. 3. 19:26



공동 목욕 - 이원규



목욕을 한다 하루분의 채탄을 마치고
늙은이 젊은이 발가벗고 모여 목욕을 한다
깨진 무릎이 쓰리고, 까진 어깨가 아려도
함께 모여 무사한 붕알, 무사한 좆도 만져보며
킬킬거리며 목욕을 하다보면
도대체 검은 탄물을 쳐바르는 건지 씻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얼굴 밑에 턱 밑에 비누물 묻혀
탄을 씻지만 목구멍에 내장에 폐에
마시고 삼킨 탄가루는 어쩌나, 어쩌나 걱정을 하면
조차공 이씨는 넉살 좋게도 한 마디 한다
몸 밖의 탄이사 비누가 최고지만
몸 속의 탄가루야 술이 최고여, 두부가 최고여!
돈만 있으면 돼지괴기가 최고여!
그래도 살아나 있으니 키득거리며
몸 밖 목욕과 몸 속 목욕을 함께하는 막장꾼들



*시집, 빨치산 편지, 도서출판 청사








서성국민학교 - 이원규



다시 살얼음이 풀리는 개울가엔
버들가지 한껏 물이 오르고, 푸릇푸릇
청보리싹 아이들 하나 둘 종소리 속으로 몰려와
소학교 여선생이 치는 풍금소리에 고향의 봄을 따라 부르면
들녘의 민들레며 냉이 들쑥들은 싹을 틔워
일주일쯤 하내리의 봄을 앞당기는 서성국민학교
나는 병방작업을 마치고 피곤한 막장꾼으로 돌아와
생각에 잠긴다 플라타너스 그 넓은 잎사귀로 얼굴 가린
나의 유년은 색바랜 일기장 속에서
꼬불꼬불 기어가는 글씨로 돋아나
뒷들 연못엔 개구리가 울고, 뒷산 양지 바른 곳엔 참꽃이
김영희 선생님처럼 참 곱게도 피었다며
개포인가 어디론가 전학 가서 소식없는 짝궁 현주가 문득 보고 싶다던
내 그립고도 배고픈 아홉살의 교정에 돌아와
그 짙푸르던 플라타너스 그늘을 생각하며
오늘은 내가 꿈꾸는 플라타너스로 섰다
지금은 어느 벽지학교 여교감으로 분필가루 묻은 귀밑머리
곱게도 희었을, 참꽃같던 김영희 선생님은
머지 않아 첫 손주를 볼 것이고,
봉숭아 꽃물 참 이쁘게도 물들이던 현주는 어느새
봉숭아꽃 씨방을 톡톡 터트리며 두 번째 아이를 낳았겠지만
지금 여기 서성국민학교엔 내 또래의 여선생 몇이 찾아와
낡은 풍금을 치며 노래하며, 몇 안되는 나의 어린 조카들에게
이 나라의 서러운 꽃이름을 가르치는데 나는,
국기계양대 위로 흐르는 구름과 구름 사이로 푸르게만 보이는
하늘을 흐르는 눈물 너머로 보았다
어째서 철이 없던 아이들의 땅따먹기 놀이는 자라
거짓말처럼 전쟁이 되고, 어째서 나비며 고추잠자리
높이 높이 날려 울리던 저 푸른 자유의 하늘엔
분노의 꽃병이 날아올라야 하는지
예나 지금이나 풍향계는 북쪽 하늘을 가리키는 서성국민학교


밤새 채탄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오늘은 내가
벌 받는 자세의 플라타너스로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