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한 시절 - 신경현

마루안 2019. 2. 26. 18:49



한 시절 - 신경현



생의 한 시절
빛나진 않지만
아직 지워지진 않고 있으니
다행이다 싶네
부른다고 불렀지만
뒤돌아 본 적 없는
매정한 시간들


흐린 날들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저녁이면
볼품없이 살아남은 뒷모습을
어루만져주던
생의 한 시절


가끔은 누군가에게 가서
흐르는 강물로 다가가
팍팍한 가슴
가만히 적셔주고 싶기도 했던
한 시절
겨울이면 달고 살았던 감기처럼
누추하고 가난한 눈물이
수시로 찾아오던
한 시절


그 시절을 건너서
왔네, 힘겹게
그리고
멀리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시절의 눈빛을 바라보네


손을 내밀어야 할지
외면해야 할지
두렵고 낯선 이 풍경 앞에
나는 지금,
또 다시 서있네



*시집, 따뜻한 밥, 갈무리








불안한 동거 - 신경현
-형수에게



한국 생활 7개월이 전부인
베트남 형수 탐
내일 모레 팔십인 어머니는
안쓰러우면서도
못마땅하다
복지관에서 배운 한국말은
아직 서툴기만 하고
이제 스물 넷 어린 형수는
타박 주는 시어머니가 어렵기만 하다


형수하고 엄마하고 사이가 안 좋으니 출장 간 사이 집에 좀 가봐라
안절부절 하는 형의 부탁으로
집으로 가는 길, 아시아 마트에서
베트남 쌀국수와 동남아 과일 캔을 사들고 간다
가난한 한국의 노동자,
나이 마흔에 얻은 형수가 애틋하기만 하고
가난한 베트남 처녀,
한 남자만 믿고 살아갈 날이 두렵기만 하고
가난한 한국의 어머니,
아들 부부의 인연이 기막히기만 하고
찍어낸 듯 가난한 풍경이 집안 가득 펼쳐진다


늦은 저녁, 밤은 깊고
다들 별 달리 할 말이 없어
들고 간 과일 캔 하나를 딴다
그래도 엄마가 형수를 이해 좀 하이소
나도 할 만큼 하는데 잘 안 된데이
형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숟가락으로 과즙을 어머니에게 먹이고
어머니도 측은한 듯 웃음 짓는다
밤하늘엔 흐린 달빛만 흐르고







# 신경현 시인은 1973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97년 대구 국제정공에서 용접일을 했다. 2004년 울산에서 중공업 하청일을 하다 2007년 대구로 와서 성서공단 노동조합 선전부장으로 일했다.지금은 지리산 자락 산골 마을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며 시를 쓰고 있다. 시집으로 <그 노래를 들어라>, <따뜻한 밥>, <당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