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길은 저 혼자 깊어간다 - 나호열
마루안
2019. 2. 20. 22:58
길은 저 혼자 깊어간다 - 나호열
직선으로 달리는 길이 뚫리고
길눈 어두운 사람만이 그 길을 간다
어깨가 좁고
급하게 꺾어들다가
숨차게 기어 올라가야 하는 그 길은
추억같다
쉴 사람이 없어 폐쇄된 휴게소
입구의 나무 의자는 스스로 다리를 꺾고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들이 길을 메운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참을성 있게 그 길은 저 혼자 깊어져 간다
저 혼자 적막을 채우고
그 길은 이윽고 강이 된다
그 길을 가 보고 싶다
사랑이란 어깨를 부딪치며 피어나는
이름 모를 풀꽃
굴곡진 길을 돌고 돌아야 얼굴 보여주는
수틀에 얹혀진 안개
멀리 멀리 돌아서 보면
직선으로 달려갔던 그 길도
알맞게 휘어 도는 것을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그 길을
오래 터벅거리며
걸어가고 싶다
노래 부르고 싶다
*시집, 당신에게 말걸기, 예총출판부
약력 - 나호열
그리움으로 피었다 지는 꽃
살아온 흔적 중에 빛나는 일만 적으라 하네
높은 지위
남에게 자랑하여 고개 숙일만한 일들을
요약해서 적는 것이 약력이라네
나이 들면서 자꾸 뒷쪽을 바라보는 것은
덧셈보다 뺄셈에 능숙해지는
바람을 닮아가기 때문이라네
바람이라고 적을 수는 없네
떠돌이였다고 말할 수는 없네
태어난 그 날부터 지금까지
먼지처럼 쌓였다 사라져버린
그 수많은 날들을
나는 축약할 수가 없다
기억나지는 않으나
밥 먹고 잠들었던
잠들었다 부시시 깨어나던 동물의 날들을
나는 버릴 수가 없다
나는 약력을 쓰네
꿈이 꿈인 줄 모르고
꿈속을 헤매다가
꿈속에서 죽어서도
죽은 것인지 조차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 마디로 줄여서 약력을 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