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홉번 죽은 별들만 아름답다 - 박연준

마루안 2019. 2. 10. 22:06



아홉번 죽은 별들만 아름답다 - 박연준



실연에 실패한 자가 걸어가고 있다
북을 치던 손은 가고 흔들림만 남았다


승리한 거울들이 돌아눕는다
일렬종대
별들의 함성
함몰된 얼굴에서 일어나는 빛의 산란


행복해서 미칠 것 같다
자지러지는 거울들
복에 겨워 죽을 것 같다
지지러지는 거울들


지금은 계절이 번복되는 시절
수천송이 연(蓮)들이
봉오리째 수장(水葬)되는 밤
떠오르지 못하도록 부력을 삼키는 입술들
열두 개의 머리가 가라앉는 하나의 몸통을 견디고
물의 혀를 찌르며 깨진 것들이 태어난다


아홉번 죽은 별들만 아름답다는데 대관절
아름답게 죽은 별이란 게 무슨 소용일까?
살아나면 어쩌지
이 많은 생의 궁극들,
피어나면 어쩌지


밤의 이적수(耳赤手)로 죽음에 성공한 귀신들,
실연에 실패한 자가 언덕을 오르고 있다



*시집, 베누스 푸디카, 창비








화살과 저녁 - 박연준



모든 것에 실패하고 싶다


동그란 빛에 들어 자는 일
삼각형으로 생각을 세우고
그림자와 빛의 이별에 관여하는 일
목소리로 빛의 무늬를 희석하는 일


발끝으로 세상을 걸으면
발가락이 가장 빨리 낡을까


민들레, 개암나무, 피자두는
내 이름을 모르겠지
나는 그들의 이름을 안다고 생각하며
실패로 이루어진 화관을 만들어야겠다


나중에


죽은 사람들에게 씌워줘야지


나중에


죽었던 사람들이 들고 있겠지


저녁에 오는 생각들은
실패에 엉기는, 실패(失敗)들일까






# 박연준 시인은 1980년 서울 출생으로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