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박계의 현대시사 - 박현수
숙박계의 현대시사 - 박현수
화양리에는 여관 아줌마만 모르는
현대시사가 있었다
여관에서, 아니 여인숙에서
하룻밤 자는 데도
이름과 주소를 기록하여야 했던
궁색한 실록의 시절
뒤통수 치던 출석부를 닮았던
검은 표지의 명부에
그 해 여름 몇 줄씩 사초를 필사했다
시선을 둘 데 없어
안절부절못하는 여자를 등지고
신경림, 최승자를 적고
욕실 속 샤워하는 그림자를 짐작하며
정현종, 김승희를 갈기고
내 어깨를 잡고 낄낄대는 여자의 교정을 받아
황지우, 김혜순을 기입하기도 했는데
막상 숙박계를 펼치면 시보다
더 어려운 이름들에 커플은 늘 바뀌었지만
시들만은 제 이름을
버리지 못하고 계절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이성복, 김남주를 쓰고 보니
너무 심하다 싶어 고친 저녁도 있었다
김지하를 쓰지 못한
소심한 오후도 빠트려선 안 되리라
이 느닷없는 호출에도
그즈음 현대시사는 평온하기만 했고
검은 책 앞에서 고민하던 사가도 잊혀갔지만
화양리에서 엮는 변두리 시사에는
계몽과 실험이
몸을 섞는 현대시사가 있었다
늘 여자 반, 남자 반으로 이루어진
금기도 없고 계통도
묻지 않는 뜨거운 불륜도 거기 있었다
거기, 화양리에는
여관 아줌마만
건성으로 읽던 현대시사가 있었다
*시집, 위험한 독서, 천년의시작
만항재 - 박현수
만항재에서 고한으로 내려오는 버스였다
처녀가 운전기사에게 가서 무어라 속삭였다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 있었다
거울에 버스기사의 눈웃음이 얼핏 비치었다
바람 센 길모퉁이에 버스가 멈추었다
처녀는 버스 뒤로 가서
들풀들 사이에 치마를 펼쳐놓고 주저앉았다
쑥부쟁이며 구절초, 각시취, 엉겅퀴 사이로
익모초 같은 머리카락만 흔들렸다
이윽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처녀가 버스에 올랐다
몸이 단 들꽃 향기도 우르르 올라탔다
버스가 고한버스터미널에 다 와 가건만
남정네들은 처녀의 오줌소리에 푹 빠져서 나오지 못하였다
그때부터 만항재 들꽃에는 오줌냄새가 나곤 했다
*시집,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도서출판 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