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쓴맛 - 박지웅
조직의 쓴맛 - 박지웅
옆길로 샌 아이들이 결국 뒷골목으로 들어가듯이
옆길로 샌 주민들은 막다른 길을 선택했다
주민 중에 누군가는 이제 막장이라고 선언했다
물러설 길 없으니 이곳만큼 유리한 고지는 없다고
골목이 밥줄이 되면서 우리는 점점 강해진다고, 믿었다
그렇게 형제가 됐지만 우리도 우리가 막막했다
터느냐 털리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모든 두려움은 살길을 먼저 설계한다
때문에 구조적으로 나약하다
제국은 보이지 않는 손을 가졌다
그 손이 이리저리 유영하며 슬쩍 촌지를 찔러넣을 때
슬그머니 떨어져나가던 북아현동 축대들, 골목들
조명이 꺼지면 밤길이 시작되고
뒷골목에 주민은 쥐 죽은 듯 기다린다
그러나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
캄캄한 길바닥에 밥그릇 같은 빛을 내려놓는 방범등
뒷골목엔 우리만 독버섯처럼 쓸쓸히 서 있었다
*시집,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문학동네
북아현동 후기시대 - 박지웅
봄이 오자 빈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장비가 뒤통수를 한 방 때리자 빈집이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속절없이 몸이 몸을 덮쳐왔다
몸이 잔해가 될 때까지 빈집은 밟혔다
그렇게 중장비는 동네 입구부터 지우고 들어왔다
주민이라는 이름은 이주민으로 개명되고
능안길이 재개발 1구역으로 둔갑한 뒤의 일이다
주둥아리가 떨어져나간 골목은 골목 속으로 숨어들고
아, 막다른 곳으로 꺾이고 꺾이면서
다시 살아나던 골목은 얼마나 질겼던가
골목은 이제 아침신문도 받지 않는다
골목 속에 햇빛의 골목이 따로 생기던 아침도
골목 속에 달빛의 골목이 따로 생기던
저녁도 발길을 끊은 저 골목
이제 어디에서 만날까 골목길 저녁별처럼 돋던 가로등을
마을길을 꽃잎처럼 흘러가는 마을버스를
북아현동 후기시대로 기어들어가는 너덜거리는 길
입구가 없어진 줄도 모르고 빈 우체통 앞에 서 있다
# 오래 전 친구 하나가 북아현동에 살았다. 나와 집이 가까워서 더욱 친해진 경우다. 굴레방다리 아현 시장 뒷골목 허름한 술집에서 참 많이도 소주를 마셨다. 둘이 대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을까. 두런두런, 티격태격, 늦게까지 술 마시다 친구 집에서 자고 오기도 했다. 가난한 동네였지만 사람들이 참 착했다. 그 착한 골목들도 재개발 광풍을 비껴가지 못하고 처참히 사라졌다. 골목길 후기시대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