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장례식 - 정훈교
겨울 장례식 - 정훈교
당신이 아침부터 와서는 소리 없이 갔다, 첫눈
저녁에 한 번 뜨거웠다 하얗게 갔다, 연탄
고요를 쓸고도 남을, 바람
평행을 달리다가도, 지붕에 닿으면 무너지는 햇살
처녀 때도 못 타본 꽃가마를 이제야 타고, 상여
무너져내리는 허공을 딱 자기 키만큼 떠받치고 있는, 산
낮 동안의 당신을 지우고, 더욱 깊어지는 일몰
그리운 것들이 왕창 몰려와, 모래 무덤이 되는 바다
하도 간절하여 한 번 닿으면 모두 몸빛이 되는, 고드름
당신과 내가 아는 그 모든 것들이 되어주는, 눈사람
온전한 허공이 되어야 뭍으로 내려앉는, 연(鳶)
첫눈, 연탄, 바람, 상여, 산, 일몰, 바다, 고드름, 눈사람, 연(鳶),
충치가 빠지고 시리고 시린, 별이 내려앉았다
*시집, 또 하나의 입술, 문학의전당
허밍 - 정훈교
전화국에 들러 미개봉된 몇 달의 시간을
꾹꾹 종이에 받아 적는다
당월에 끝나지 않은 음성이
석 달째 미납되어 있고, 수신자 부담으로 된 음성도 몇 있다
내가 아는 요금 명세서엔
대문을 나간 아내
마지막 신호음을 실감하지 못한 아이,가 웃으며 누른 재버튼의
기록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아이 할머니 음성에 따르면
초저녁부터 진눈깨비가 내렸고
마른 음성은 초인종에 딱 붙어 있었다고 했다
대문을 열자마자
물안개를 피우며 뒷모습이 증발되더라는 것이다
반쯤 젖은 음성은 욕탕에서 나온 후
젖은 음성을 수건으로 탈탈 털어냈다
밤새 창문을 뒤흔드는 바람의 음성도
방음벽이 된 미세한 음역을 뚫진 못했다고
난생 처음 연주한 얇은 멜로디는 이리저리 모서리를 찾아다니다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잠해졌다고
술버릇처럼 바탕화면 가득 정적을 깔아놓더니만
배터리 경고음도 없이 제일 먼저 꺼졌다
검은 정적을 입은 아이는
버튼을 꾹꾹 누르며 여전히, 웃고 있다
# 지난 봄에 읽었던 시집을 다시 꺼냈다. 좋은 시는 언제가 발견 되기 마련, 그때도 늦었고 지금도 늦었다. 밀린 숙제 하듯 한 자씩 필사했던 노트에서 몇 개의 시를 꺼낸다. 가슴 후볐던 구절들, 벚꽃 질 때 읽었던 시를 겨울에 읽으니 더욱 좋다. 다소 우울한 시를 읽는 겨울밤이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