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환생을 위해서는 환승해야 한다 - 김연종

마루안 2018. 11. 26. 21:33



환생을 위해서는 환승해야 한다 - 김연종



실종된 하루를 되찾으려면
환승 버스를 타야 한다
반쯤 기운 지상(地上)의 하루가
이미 시든 반나절을 찾아 지하 무도장으로 향한다
술래잡기처럼 어두운 조명에서
서로를 밝히며 제 살을 부빌 때마다
아주 잠깐 짐승의 기척이 반짝일 뿐
슬픔의 빛깔이 겹친 적은 없다


경로 우대의 지하철을 타고
묘지처럼 포근한 땅속으로 파고들 때만 해도
환생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다시 버스를 타고
지하에서 잠시 망각했던
죽음 너머의 하루를 보고 있노라면
먼저 간 아내의 처자 적 목소리 같은,


환승입니다
환생입니다



*시집, 청진기 가라사대, 천년의시작








문지방 연대기 - 김연종



턱없이 높았다
네 발로 기어도 오르기 힘들었다 주변엔 늘 무언가가 널려 있었다 잡히는 대로 가져가 입으로 빨았다 아무도 모르게 뒤집기를 시도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누웠다 거기를 넘어야만 세계의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수시로 넘나들었다
두 발만으로도 충분했다 저만치 낮아져 아예 눈에 띄지도 않았다 뒤축이 닳기 전에 자주 신발을 바꿔 신었다 넓은 광장으로 숨어들면서도 눈높이는 변하지 않았다 짧은 바짓단에도 눈을 치켜뜨는 버릇이 생겼다


자꾸 발길에 채였다
서로에게 길들여질 무렵이었다 익숙한 발걸음에도 시시비비를 따졌다 그것은 안과 밖, 안방과 거실, 삶과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문턱이다 발로 밟으면 슬그머니 기운이 빠져나갔다 구부러진 등을 낚아채기에는 좁은 치마폭이 수월했다


이별의 내부에는 끝없는 계단이 있다지만
넘을 힘도 없어졌다
네모난 틀 안에 갇혀 지냈다 오동나무 그림자처럼 앞과 뒤의 경계를 짓기 시작했다 생의 들것을 사용해도 건너기 힘들었다 좁디좁은 틈새로 빙하기의 바람이 불어왔다 빠르게 빠르게 더 빠르게


별안간 사라졌다
차갑고 고요하다 귀를 대고 있으면 비자나무 숨소리가 들린다 불길한 예감은 기적처럼 맞아떨어진다 휠체어나 이동 침대가 자유롭게 드나든다 이제 더는 쓸모가 없다 표정들이 하나로 묶여 서로 늙어가는 방에서는


베개로 베고 누우면 그대로 관(棺)이 되었다





# 참 시를 잘 쓰는 의사 시인이다. 전업 시인이 아닌 본 직업이 있는 시인들이 꽤 있는데 이만큼 시 쓰는 실력이 탄탄한 사람은 드물다. 첫 시집보다 훨씬 정제된 문장에다 문학적 완성도가 높아졌다. 자기 색깔이 분명한 시를 쓰는 줄기도 더욱 단단해졌다. 나는 왜 이런 시에 눈길이 오래 가는 것일까. 반복해서 읽고 싶은 좋은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