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기가 나를 세운다 - 서규정
줄기가 나를 세운다 - 서규정
꼭 한 놈만 죽이고 싶은 가을이 가네
딱 한 번만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게
십자성 별빛따라
한 놈의 흉곽을 확 열어 제끼고
사형수가 되었으면 하네
재판관이 왜 그랬냐 물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장기 기증을 권유하는 덜 떨어진 녀석이
간, 심장, 눈, 그 중에 하나만 빼놓고 가라 하면
쓸개나 떼주고 가리
TV에 자주 등장하는 인기승려가
지은 죄 씻고 가라 하면
검은 장갑이나 벗어 주고 가리
마지막으로 남길 말 없냐 물으면 고개를 살레살레
한없이 열어 본 해바라기 빈 가슴
*시집, 직녀에게, 도서출판 빛남
망해사 - 서규정
가고 싶은 길은 난마처럼 얽히고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은 하이웨이로 열린다
해운대 수평선을 멀뚱멀뚱 바라보며 살다
발작하듯 금만경의 지평선으로 난입하는 동안
계속해서 여관 사우나탕 간판에 간판
전주 지나 김제로 막 벗겨지는 길
안마시술소를 가르치는 가운데 손가락을 금반지처럼
홀 빼갈 것만 같은 광활 지나 심포
무슨 무슨 사고로 혼자 살고 있다는 사람
물어 금방 찾을 수 있는 그 사람의 마을 입구에서
뒤돌아 선다 절대로
사랑이라는 이름이 부르기 쉬워서는 안될 것 같아
마당이 바로 바다인 망해사에 앉아 멍하니
서해로 발을 담근다
부르지 말자
사랑은 사랑한다는 전갈이 아니다
한나라를 사랑했다면 무조건 백성을 견디는 것이리
눈물 속에 문어 대가리처럼 하얗게 익은 낮달이
열 개도 넘는 헛다리를 짚으며 떠오르는 어허 통속!
# 서규정 시인은 1949년 전북 완주 출생으로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황야의 정거장>, <하체의 고향>, <직녀에게>, <겨울 수선화>, <참 잘 익은 무릎>,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다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