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불려 차디, 차던 - 황학주
바람에 불려 차디, 차던 - 황학주
여러 날 말을 듣지 못하다 전등불 속에 귀가해
홀로인 등성이 팔꿈치를 들어 껴안으면 당신은 울었다.
내 오늘
천마산 억새가 감추는 산길을 파며
지워졌다 뻗는 뉘우침 끝의 울음 따라가면
내려오는 바람 소리에 귀뺨이 들어 있고
찬비 뚝 잘려 내린 뒤 입가를 닦을 때
떠돌던 곳에서 이 자리 장막으로 들어오는
파헤쳐지고 바람에 불려 차디,
차던 신혼 살림살이의 가랑잎,
어느 파도에 이제, 사람 모인 이 적막 허공을 쳐버리고
눈익은 핏멍울을 풀고
막힌 한 마디씩 내 사람 귓가에 떨어뜨리며
자근자근 그림자 지는 봄볕 한 귀퉁이 짚어나가냐
꼬불꼬불한 산길의 육체를 따라 들어가고 싶은
당신의 보일 것 다 보이는 속병 어떻게 하냐.
못된 인연의 바퀴살이 결국은 감겼으나
가슴은 새로 쓸 수 있다하니 다친 가슴
단단히 잘 굳으면 나가서 빗줄기를 맞을 때
잎이 피고 다시 피어오르는 한 봄을 믿는 것이
당신은 서럽지 말았으면.
*시집, 사람, 청하출판사
산 32번지 - 황학주
맨 처음 같이 들어온 왼쪽 길은 어둡고
우리 차고 쓴 입과 몸
끝내 잘려 나간 오른쪽 길은
새 길이라 훤하다.
오늘은 정말로 믿어지지 않는다.
벗기지 않아도 떡벌어진
슬픔의 가슴을 끌고
딱지가 앉은 상처처럼 매화가 붙은 금곡 교회 앞뜰을 지나
두 줄기 눈물 사이에 있는 당신의 겨울 빨간 콧등같이
추위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움직이는 마음이 되고 싶었지만,,,,
나는 한때 내려달던 단추를 입에다 달고
내 사랑이 발 못 대는 곳으로 보내 버린 당신이 있는 한
할 말이 없다.
떨어진 소매 속 같은 길로 이제는 스스로 한 번 더 와
당신이, 같이 쓰는 주인집 부엌에서 딸각거린다면
저녁녘 살 난 치욕의 상처를 타내리는 내
눈물은 얼마나 따스로울까.
울며 떨어져 남은
내 사랑의 허구헌 솜털까지 우는 것이 보이고
왼쪽 길과 오른쪽 길이 어굴(語屈)하게 붙은
금곡리 산 32번지,
한 떼의 가시나무에 나가 걸려도
저 비탈에 외등불은 찢어지지 않고
낮은 데를 잡고 일어서는 풀줄거리 같은 사람들 보이는데
괴롭고 외로워서 식식대는 내 허리는 두리번거리고.
# 오래 된 시집을 들추다 보면 시도 마음에 들어올 때가 있음을 알게 된다. 밋밋하게 지나쳤던 시가 뒤늦게 떨림을 주는 경우가 있다. 훌쩍 겨울빛이 도는 요즘 시에서 풍기는 오래 묵은 쓸쓸함이 위로가 된다. 황학주가 좋은 시인임이 분명하지만 그의 진면목을 마흔 넘기고야 알았다. 시집 첫장 날개에 이런 구절이 인상적이다. 30년이 지난 시절 첫 시집을 내던 시인의 마음이 읽힌다.
꼭 시만 시가 아니라는 것을 알 무렵,
첫 시집을 낸다.
떡과 국을 돌리듯
즐거이 시집을 돌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도, 시를
혼자서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문제는 사랑문제라는 것도
알고 있으므로 참으로 이 일은
고통스러운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