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물결무늬 - 김선
새의 물결무늬 - 김선
십일월 새들이 저녁 한 끼를 위해 가는 길이 멀다
검붉은 저녁놀은 길 잃은 새의 무리가
지친 몸을 두었다 간 흔적이다
새들이 잃어버린 좌표를 간직한 별들이
아직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시간
목어의 등에 입혀진 빗살무늬가
새들이 잃어버린 길을 가리키고 있다
젖은 날개 꺾어 처마 밑에 부리고 가던 새들이
풍경 속에 겹겹이 물결무늬를 새겨 넣었을 것이다
그만 무릎을 접고 싶을 때마다 잠들지 말라는 이정표다
가시들 도사린 까만 밤의 깊은 곳까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하늘에도 남겨 놓고
바위에도 보이지 않게 새겨져 있다
그 저녁, 지친 몸을 끌고 찾은 선술집에서
하루 노동을 씻어내는 막걸리 잔에도
옮겨진 물결무늬가 출렁이는 걸 본다
시간을 끌고 가는 길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팔뼈 어긋나도록 금 그어가는 노동의 수고로움만큼 열린다
서두르지 말고 달디단 파장을 나누며 가라고
새들의 물결무늬가 내려앉은 것이다
길을 다시 찾은 새들이
길 없는 길에 무늬를 새로 새기는 중이다
*김선 시집, 눈뜨는 달력, 푸른사상
코스모스 - 김선
귓가에 쟁쟁거린다
(느그 엄니가 시집 막 와서
샐팍으로 들어오는디
햐, 나는 코스모스가 걸어온 줄만 알았이야
음마, 인자 그 머시냐잉
속치마 고름 풀어헤치는디
코스모스 잎삭이 한나씩 한나씩
뜯어져갖고 날라다니드마
긍게 그것을 잡을란디 손에 잘 안 잡히드랑게
하이고 하양 속살은 또 월메나
맨들맨들하든디야
나가 그날 코스모스 밭길을 걷고,
또 걷고 밤새 걸었이야}
아버지 무덤가
하얗게 무리지어 핀 코스모스 잎들
어머니 닮은 얼굴로
하늘거리며 서 있다
# 위 두 시를 이 시집에 실린 중에서 대표작으로 생각한다. 아버지의 신혼 추억을 이렇게 아름답게 옮긴 시가 있을까. 자고로 자식은 많이 낳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