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표를 하다 - 이상국
마루안
2018. 10. 30. 19:10
표를 하다 - 이상국
물을 버린 나무들이 동네 건달 같다
여름내 가죽을 뚫고 나온 햇송아지의 뿔,
강가의 왜가리들이 내년에 쓰려고
물속에서 한쪽 다리를 들고
거기다 표를 한다
오래도록
울타리 팥배나무에게 젖을 물리던 해도
붉은 산을 넘어가는 저녁,
나에게는 아직 많은 가을이 있지만
이번 가을은 이게 다라고
나도 마음에 표를 한다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창비
가을 서사 - 이상국
나는 이파리처럼 가벼워서 두고 가기 좋으나 그래도 해질 때 바닷가 술집에라도 데리고 가면 나의 시가 얼마나 좋아하겠냐며....
그전에 선배 시인이 죽어 화장장 불가마에 들어가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의 시는 계속 세상을 떠돌았다. 시처럼 가여운 것도 없다.
사람들이 무작정 가을 산에 와 죽으니까 군(郡)에서 자살수상자 신고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그래도 어디든 죽음은 제집에 들기 마련이다.
나의 지구에서 가을 하나가 떠나간다. 어둑한 길을 걸어 당도했는데 그래도 그는 나를 두고 간다. 잘 가라 가을.
# 이상국 시인은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으로 1976년 <심상>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뿔을 적시며>, <달은 아직 그 달이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