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거룩한 식사 - 이종형
마루안
2018. 10. 16. 22:31
거룩한 식사 - 이종형
머리칼과 얼굴에 튄 몇 점의 페인트 자국을 미처 닦아내지 못한
광대뼈 도드라진 사내가
식탁 위에 차려진 팔천 원짜리 수육백반과 소주 한 병과 마주 앉아 있다
숟가락을 들기 전에
두 손바닥을 몇 번 비빈 사내는
맥주잔에 투명한 한라산소주를 콸콸 따라 가득 채우곤 단숨에 들이켰다
신음도 미동도 없이
손등으로 입술을 스윽 훔치고는
두 장을 포갠 상추 위에 반 한 술 올리고
돼지 수육에 마늘과 쌈장까지 얹은 정성스러운 한 쌈을
우직하게
오래오래 씹어 삼켰다
때아닌 가을비 내려
일당의 반이 사라진 반대가리의 날
이런 날일수록 끼니라도 거르지 말아야 한다던
신지항과 사라봉 사이
단물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페인트공 사내의 이른 저녁 식사
맞다 한 숟갈 밥이라도 저렇게 치열하게 씹어야 한다
되새김질하듯 천천히 음미해야 한다
누군가의 한 끼를 우연히 지켜보다
없던 입맛이 돌아와 덩달아 씩씩하게 밥그릇을 비운 날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10월 - 이종형
이 좋은 햇볕 그냥 보내면 죄짓는 거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가 하신 말씀
뒤란 장독대 반짝거리게 닦아놓고도 햇살은 남아
누렇게 변색된 격자 창호지에 새 창호지 바르는 날
밀가루 풀을 몰래 손가락으로 찍어 먹다 혼나던 날
긴 겨울밤을 위해 문풍지를 길게 남겨둬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 날
흰 창호문은 결 좋은 햇살에 말라가고
첫눈이 내리려면 몇 밤 남았는지 헤아리듯
손가락으로 톡톡 퉁기면
동동 작은 북소리 울리던 날
아무것도 한 일 없어 죄짓다 말고
문득,
당신 생각에 눈시울 붉어지는 오늘 같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