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파주 - 이승희

마루안 2018. 10. 7. 19:43



파주 8 - 이승희



쓸모없음의 완성 같은 거
걸어가던 길이었고
지나가는 길이었으므로
나는 비로소 혼자라는 걸 알았다


버스 한 대가 천천히 지워지는 동안
먼 나라 사람처럼
어디까지 가서 죽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던 거
공원을 지나가듯
이 세계를 지나면
미래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 줄 알까


종일 같은 음악을 들었다
함께 듣던 이가 있었다
어떤 안부도 도착하지 않았고 묻지 않았지만
기억을 하나씩 지우며 버티는 일
나무 한 그루가 괴로워할 거 같아서 나는 먼 길을 돌아서 갔다고


파주는 혼자서 와야 한다
실컷 버려지고 나면
나는 파주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시집,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문예중앙








파주 9 - 이승희



별 사이로 뱀 한 마리 오래 지나간다


비로소 낮으로부터 놓여난 너는
발가락이 많이 굽었다
질문도 없이 만나는 생처럼
구부정한 어깨를 지나면
이국의 밤이 따뜻해질까
국수 먹으러 갈까
카드점을 보러 갈까
좀 아파 보여


오늘 뜨는 별은 다 모르는 사이 같아서


가만히 만져보는 어둠
반쯤 둥근 무덤 같구나
어느 부분이 지워졌는지 알 수 없어서
막차가 사라진 곳으로 자라는 식물들
너무 멀리가지는 말자고
남은 얼굴로 웃어주자


여기 없는 그 모든 게 별이 된다는
우린 그런 이야기를 한다


너는 술에 취했고 나는 장롱에 등을 대고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나는 혼자서 낭떠러지처럼 늙어가는 꿈을 꾸었다. 죽을 준비가 되었으니 우리 이제 같이 살자, 같이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