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춧대가 찬이슬에 쇠어가는 저녁 무렵 - 권오표

마루안 2018. 10. 5. 21:19



고춧대가 찬이슬에 쇠어가는 저녁 무렵 - 권오표



쥐똥나무 울타리에 뱀 허물이 상모 끈처럼 걸려 있다


손톱물에 쓸 백반을 찾던 누이가 봉숭아 꽃잎에서 물큰한 비린내가 난다며 울밑에서 따다 모은 꽃잎을 뒤란 귀퉁이에 묻고는 침을 세 번 뱉는다


어린 감나무는 성성한데 늙은 감나무는 선들바람에도 하루하루 수척해진다


월남 갔다 외다리로 온 점수 아제처럼 고래고래 지르던 매미 울음도 잦아들고


마당 가득히 잠자리 떼가 운동회 마당처럼 우르르 모였다 흩어지곤 한다


여름 내내 짓무르던 무릎의 생채기에도 언제쯤 꼬들꼬들 딱지가 앉으려는지


허물 벗은 뱀은 내년 봄에 또 장독대에서 맹감 같은 붉은 눈으로 나와 마주치려는지


고춧대가 찬이슬에 시나브로 쇠어가는 저녁 무렵



*권오표 시집, 너무 멀지 않게, 모악








독거(獨居) - 권오표



마을로 동냥 갔던 귀뚜라미가
대문을 기웃거리는가 싶더니 슬그머니
귓속에 들어와 운다
밤새도 뒤척이며 함께 운다 밤마다 운다
뒷산에 엎드린 곰바위처럼 막무가내며 속수무책이다


서리 내린 아침 마당 한켠에
날개 다친 새가 새빨간 눈을 뜨고 죽어 있다
아궁이의 재도 식었다


토방에 놓인 신발을 밖으로 돌려놓는다





# 유난히 더위가 심했던 지난 여름날이 언제였던가 싶게 밤이면 창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바람이 서늘해진 요즘이다. 오지 않을 것 같던 가을이 이렇게 완전히 자리를 잡으면 가을 타는 몸은 새벽에 잠을 자주 깨어 뒤척인다. 오랜 기간 침묵 끝에 시집을 낸 시인의 말이 유독 쓸쓸하게 다가오는 것도 가을 탓이다.


*시인의 말


스무 해를
부끄러움도 없이
그럴싸한 변명으로 탕진했다


저기
저무는 산모퉁이
남루한 풍경들이 애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