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랑의 잔고 - 조연희

마루안 2018. 10. 3. 19:59



사랑의 잔고 - 조연희



그녀는 오늘도 현금인출기 앞에서
사랑의 잔고를 확인한다.
그에 대한 한도를 가늠해본다.
얼마를 견딜 수 있을까.
삶은 영원한 인플레이션 같은 것이어서
그녀의 그리움은
마이너스 통장으로 남아 있기도 했다.
이용가능 시간도 후배위뿐이어서 그들의 섹스는
불능코드가 찍힌 명세서처럼 구겨져 있다.
눈물 한 방울을 스캔하자 승인된 그녀가 뜬다.
때때로 눈물 나게 아름다운 꽃은
한도초과 된 삶 속에서 피어난다.
사람들은 꽃의 배후를 묻지만
어떤 꽃은 절명의 순간에 핀다는 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
장판 밑의 지폐는 따끈따끈했지만
마이너스 통장에서 인출된 지폐일수록
영하의 체온을 품고 있었다.
아무런 희망도 입금되지 않는데
자꾸 그녀는 어디로 이체되는 것일까.
그가 휴면계좌 속에 누워 있다.
삶은 재발급이 되지 않는 신용카드였으므로
그녀는 다시 한 번 제 몸을 밀어 넣으며
그와의 이용한도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시집, 야매 미장원에서, 노마드북스








쓸쓸한 연애 - 조연희



너를 안은 것만큼 쓸쓸한 일이 있을까.
붉게 물든 무릎을 맞대고 있으면
초저녁 매미 울음소리도 붉다.
매미는 죽기 전 가장 큰 소리로 운다.
일제히 울어대다 한순간 하얀 정적
그 적막함 때문에 매미는
다시 한 번 목놓아 우는 것이다.
쓸쓸함이란 그렇게 곡소리가 끊긴 상갓집처럼
적막한 것이어서
사랑도 이별도 한 순간의 통곡처럼 사라지고
매미 울음소리도 사라지면
붉게 무릎을 맞댄 저녁
아무것도 붙잡고 싶지 않은 시간이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세월처럼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