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기 전부터 - 김형미
가을이 오기 전부터 - 김형미
가을이 오기 전부터 비는 내리고 있었던 거라
사람이 떠날 때만큼이나 마음 수란한 한기가 돌아
핏속까지 서늘해지는 저녁
뜬눈으로 어둠을 굽어보던
산 사람들 가슴이 적막해지는 거라
그들이 고뇌하는 시간의 문간마다
투덕투덕 귀얄문 새겨지는 소리가 이승의 밤길을 묻는다
쓸쓸한 그 물음 속에서 비는 내리고
오직 당신 한 사람이 흙으로 빚어지고 있는
지금은 살갗에 내화토비짐 흔적이 남는 시간
만날 사람은 언제고 다시 만날 테지만
우리는 어느 때 다시 만나질 것인지
크게 느크해서 당신을 열고 들어가보고 싶어지는,
가을이 오기 전부터 우주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한 번은 맞닥뜨리게 될 천연을 기다리며
투덕투덕 마른 억새잎 같은 비는 내리던 것인데
*시집, 사랑할 게 딱 하나만 있어라, 푸른사상
구절초 - 김형미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아홉 번을 굽이도나
가을볕이 꼭 저 누울 자리만큼 짧아져 있을 때
얼마나 애가 탔으면 속불을 끌어올려
입이 바트도록 호롱새는 울지도 않나
봄 가고 여름 가고 구월이 되어서야
계절 끝에 매달려서 온 저 꽃은
꼭 너를 살릴 만큼의 독성을 안고
호롱호롱 호롱새처럼 큰 약이 되려 하나
먼저 피었다 간 꽃은 어느 산 아래 묻히고
오랜 기다림 끝 구절초는 기다림이 약이 되어
네 베갯잇 속에서 앓던 두통을 거두어줄 것인데
얼마나 다가가고 싶었으면
아홉 번 꺾이면서도 꽃이 되려 하나
약으로라도 꽃이 되고 싶어하나
# 김형미 시인은 1978년 전북 부안 출생으로 원광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0년 진주신문 <가을문예>와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2003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산 밖의 산으로 가는 길>, <오동꽃 피기 전>, <사랑할 게 딱 하나만 있어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