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소수자들 - 백무산
기억의 소수자들 - 백무산
불을 끄고 화장실을 나와 외출을 하고 돌아왔는데
화장실에 불이 켜져 있다
새 책을 꺼내 읽으려고 펼치는데
밑줄이 그어져 있다
버리려고 쓰레기통에 던져둔 메모지가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유령이 사는 걸까
경계심을 풀어서는 안된다
나는 천천히 인정해야 했다
망각이 사는 걸까
망각은 쓰레기처럼 제외될 뿐이지만
쌓이고 쌓인 기억의 지하실이다
날아온 화살도 없는데 불쑥 경련이 일어나는 것도
부르지 않는데 노을을 따라나선 것도
바람이 불었을 뿐인데 다리가 풀려버린 것도
그대도 잊고 그리움만 남듯이
망각은 쌓여 늪이 되어 더는 비워버릴 수 없다
권위는 역전된다
잊혀진 의미들
기억의 소수자들
기억의 권위에서 버려진 것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 창비
뭔가를 하는 거다 - 백무산
얼굴 반쪽이 흘러내렸고
목발을 짚었고 때 전 플라스틱 그릇을 든 사람이
흘러간 유행가를 부르며 내 앞을 흘러간다
도무지 이 세련된 도시의 지하철에서 밥을 구하는 방식이 아니다
주든 말든 그릇을 내밀지도
참담한 표정도 애걸하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목에서 나오는 소리는 노래인지 게워내는 소리인지 모를 지경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무엇이라도 하고 있는 거다
자신이 가진 것 무엇이라도
불쑥 손바닥을 내밀거나 비참을 연출하지도 않는다
뭔가를 하는 거다
들판에는 아무리 하찮은 몸짓에도 굶기는 법이 없다
누군가의 꾸물대는 몸짓도 누군가의 숨구멍이 되고
누군가의 똥도 누군가의 양식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슬픈 노래도 누군가의 사랑을 깨운다
서늘하게 내 앞을 지나가는 것
그렇게 뭔가를 하고 있는 것
서늘하다는 것
오직 내게 주어진 것 그 이상이 없다는 것
눈을 번들거리며 제 자리를 바꾸지 않는다는 것
순환이 되는 뭔가를 차별이 없는 뭔가를
자신이 가진 것 전부를 다해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
아직 별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
# 초원의 맹수들처럼 시인에게도 자기 영역이 있다면 백무산 시인 만큼 자기 영역이 확실한 시인이 있을까. 지금은 많이 시들해졌지만 한때 이 시인의 시집을 들추는 것만으로 가슴에 힘이 들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폐허를 인양하다>는 백무산 시인의 정점에 있는 시집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