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 그 집 앞을 지나다 - 허림
달밤 그 집 앞을 지나다 - 허림
참깨를 베어 멍석에 둘둘 말아 지게에 지고
저녁 햇살이 떨어진 길을 걸어 내려온다
검게 그을린 담장을 돌아 별이 길게 꼬리치며 떨어진다
어린 시절 강물 위로 물수제비뜨듯
불똥을 튀기며 떨어지는 별을 주우러 간 날도 있었다
자서전을 풀어내는 문장 뒤에는
햇살 반짝이는 무늬가 있다
제삿날 저녁이면 달빛처럼 어른대는 기억을 더듬느라
나이든 고모들은 안방에 둘러앉아 헛헛한 삶을 풀어놓고
아재들은 흐린 기억에 덧칠하며 술독을 비우고
나는 슬그머니 툇마루에 나앉아
약과나 깨다식을 먹으며 전설의 별들을 바라보곤 했다
문간에 흰둥이가 무거운 목줄을 끌며 일어나고
밥통이 뒤엎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전등을 비추자
인광 시퍼런 눈알이 둥글리며 내게로 건너왔다
섬뜩하니 뿜어대는 빛의 기억
풀벌레처럼 울고 우는 또, 이슬에 젖은 달빛이
생생히 왼쪽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시집,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 황금알
여인(與人) - 허림
어느 날 그대는 붉은 빗줄기가 되어 루오의 자화상 같은 얼굴 들이밀고 웃을지 모를 일이지만 아무 탈 없이 아무런 표정 없이 서 있는 긴 그림자처럼 엉거주춤 멈춰 선 듯 떠가는 구름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우기를 지나 밤하늘에 별들이 문을 닫는 새벽 조그만 교회 깨진 유리창 상처를 꿰맨 성자처럼 여리고 순진한 영혼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다만 흘러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처럼
강물은 흘러가며 또 깊어지고
구름 또한 무거운 가슴 비울 때까지
붉은 빗줄기가 되어 지나가고
일찍 잠에 들었다가 새벽에 깨어 그대의 첫 시집을 뒤적일 때
그대 아픔의 한 끝이 사랑이었다는 것 또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내 사랑으로 하여 죽을 만큼 지독해지기를
*시인의 말
아버지는 누워 있고,
나는 서 있다.
가을, 잎 넓은 나무가 제 몸 한 겹 내려놓듯이
지금 그 순간의 몸짓을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이다.
생의 한 가운데 가부좌 튼 부처처럼
아무런 말도 없다. 그저
점안의 문자를
생의 행간을 지나온 풍경의 주름을
빤히 들여다 볼 뿐이다.
난분분하다.
그게 詩일 것이다.
아직도 시는,
사는 것만큼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