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때수건이 열리는 물오리나무 - 김중식

마루안 2018. 9. 9. 18:59



때수건이 열리는 물오리나무 - 김중식



자작나뭇과 물오리나무 이름표를 단 나무
꼭대기에 때수건이 장갑처럼 걸려 있다
옆 나무는 빠마를 하시는지
흰색 비니루 자동차 커버를 쓰고 있다


남자들은 등치기로 나무를 넘겨뜨릴 듯,
아파트 부녀회원은 복면 쓰고 종주먹을 치켜드는데
개를 사랑한다면 개 눈치의 1푼어치만 사람을 챙기라는 것;
산수(山水)가 우째 풍경이 아니라 풍속이다


그래, 나는 다음 생엔 사람 몸 받기 글렀지
짐승의 짐승으로 살아도 밑지는 장사는 아닐 테지만


세상이 아니라 사는 게 더러운 것;
영혼이 피부 바깥을 뚫고 나온 적이 없어서
피부까지가 세상의 부피인 사람들,
몸 밖에도 세상이 있는 줄 모르는;


목 졸라 버린 맥주캔이 새끼 오리처럼
오리 배를 따라오는 인공 호수에서
쌍스러움과 성스러움이
하나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고속도로를 달릴 때 보았던 풍세(風世) 톨게이트
로 빠져나가면 바람의 세상일까
새가 나보다 가볍다고는 말 못 하지만
자꾸 산 너머를 보게 되는데


껌 짝짝 씹는 여름 태양 아래
절벽에는 앉은뱅이꽃 피고
비봉 마애석가여래는
진즉 실족한 듯


나, 까칠해졌구나
살아남은 것들은 다 장(壯)한 것들,
건들지 말자


하루는 길지만 인생은 짧은 것이니.



*시집, 울지도 못했다, 문학과지성








자유종 아래 - 김중식



가죽나무 타고 넘어 들어갔던 서대문형무소
왜식 목조건물 사형장은 나의 놀이터였지
도르래에서 밧줄을 끌어 내려 목에 걸었지
축하해, 젊음의 교수형을 집행하는 화환(花環)
목의 때와 살갗과 육즙으로 엮은 비린 동아줄
미친 시대가 하필 우리의 전성기였으므로
돌아버리지 않아서 돌아버릴 것 같았던
속으로 화상 입은 청춘이었으므로
유언이래야 "할 말 없다"는 것이었지, 개로
태어나더라도 늙은 개로 태어나고 싶었지
짖지 않는 개로 태어나고 싶었지, 덜컹
발판을 열면 다리가 뜨고 혀가 나오겠지
죽을죄는 없고 죽일 벌만 있을 뿐, 발아래
컴컴한 식욕을 날름거리는 콘크리트 지하실
나는 뛰어들었지, 귀 막고 입 다물며
나는 뛰어들었지, 다시는 젊지 말자고





# 새 시집이 나왔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서점으로 달려갔다. 유난히 이 시인의 시집 발간 소식이 반가운 것은 너무 오랫동안 시집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려 25년 만의 시집이라니 반갑다기보다 놀랍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강렬했던 첫 시집 못지 않게 인상적인 시들이 많은데 그 중 두 편을 먼저 골랐다. 비유를 가득 담아 군데군데 박힌 냉소적인 싯구가 가슴은 콕콕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