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한 생애가 간다 - 배영옥

마루안 2018. 9. 4. 22:42



한 생애가 간다 - 배영옥



구불텅구불텅
진흙탕보다 더 질척이는 한 생애가 간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흰 머릿수건에 닳아빠진 호미 자루 쥐고
늙은 허리 구부리고 휘적거리며 간다
한바탕 춤사위라도 벌이시려는가
농악 소리 들리는 저 건너 밭둑
막걸리라도 한 사발 들이켜시려는가
저 붉은 노을 용광로를 향해
한 생애가 간다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구렁이들처럼
날품 끝낸 노인들
잘 닦인 산책로를 삼삼오오 줄지어 간다
몸뻬와 챙 넓은 밀짚모자
신발에 끌려
너덜거리는 저녁 해와 함께
한 생애가 간다



*시집, 뭇별이 총총, 실천문학사








풀밭 위의 악몽 - 배영옥



스무 살 때 나는 이미 세상을 버렸다
상복에 파묻혀 울지도 못했다 나는, 속에 것 다 게워내고
우황청심환을 먹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 있었던 것,
죽어 있는 울음을 다시 불러들이는 어떤 방법도 알지 못했다
죽음과 울음 그 불가분의 관계를 깨뜨리고 싶었다
나는 내 핏속에 흐르는 불협화에 감사했다


그러던 어느 봄날이었다
단지 풀밭 위를 걷고 있었을 뿐인데
노랗게 들뜬 민들레꽃들이 일제히 나를 쏘아보는 것이었다
우황청심환 금박지 닮은
샛노란 꽃 모가지들의 어질머리 성토
그건 당신이 내게 보내준 추상같은 일갈이었다


너무 늦게 찾아온 고향 풀밭


내부에서 외부로 번지는 파장에 끌려
울다가 걷다가
나는,
눈물도 강이 되어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배영옥 시인은 1966년 대구 출생으로 계명대 문예창작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얼마전에 5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 시집은 그의 유일한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