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백색 자서(自敍) - 임봄

마루안 2018. 8. 31. 18:27

 

 

백색 자서(自敍) - 임봄

 

 

열아홉, 스물아홉, 서른아홉,

시간의 고개를 넘어야만

더 잘 알게 되는 것들이 있지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것들

귀를 잘라내야만 들리는 것들

 

귓속의 달팽이가 잠들고

보리수 열매가 빨갛게 익으면

차츰 네가 보일 거야

성문이 닫히고

까마귀가 울기 시작하겠지

 

저녁이 오면 작은 초 하나를 켜자

물고기 비늘은 어제보다 반짝거리고

짐승들은 순해지겠지

벽은 고요해지고

구름은 더 낮아질 거야

 

한 세계를 쉼 없이 걷던 신발 위로

무덤 같은 시간이 흐르면

항아리에서 잘 익은 술을 꺼내

두 개의 유리잔에 부어 마시자

 

그리고 둥근 식탁과 이야기하자

먼지가 되어버린 책에 대해

항상 우리 곁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시집, 백색어사전, 출판사 장롱

 

 

 

 

 

 

백색-나이테/ 임봄

 

 

저녁 무렵 낯선 바닷가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깨진 조개껍데기 같은 것

 

구름 사이 새가 할퀸 상처를 발견했을 때처럼

낯선 풍경 속 삶의 흉터에 눈이 가는 것

 

멀리 보이는 파도의 너울에 대고 가만히

어제 죽은 새의 행방을 묻는 것

 

파도에 밀려와 해변을 서성이는

한쩍 구두에 오래 안부를 전하는 것

 

내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동요를 흥얼거리는 것

 

바닷가를 가득 메운 검은 조약돌에서

숫자로 셀 수 없어 흘려보낸 것들을 떠올리는 것

 

일기예보 따위는 듣지 않아도 괜찮다고

마지막 차편 따위는 잊어도 괜찮다고

 

엄숙하게 입을 다문 이마 위 굵은 주름처럼

푸른 이빨을 부딪치며 다가오는 시간의 간격을 세는 것

 

수백 마리 오리 떼가

물의 나이테를 세며 내일을 잊은 것처럼

 

평온하게 흘러가는 물을

종일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 것

 

 

 

 

# 임봄 시인은 (본명 임효선) 1970년 경기도 평택 출생으로 고려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2009년 <애지>로 시 등단, 2013년 <시와사상>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백색어사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