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자서(自敍) - 임봄
백색 자서(自敍) - 임봄
열아홉, 스물아홉, 서른아홉,
시간의 고개를 넘어야만
더 잘 알게 되는 것들이 있지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것들
귀를 잘라내야만 들리는 것들
귓속의 달팽이가 잠들고
보리수 열매가 빨갛게 익으면
차츰 네가 보일 거야
성문이 닫히고
까마귀가 울기 시작하겠지
저녁이 오면 작은 초 하나를 켜자
물고기 비늘은 어제보다 반짝거리고
짐승들은 순해지겠지
벽은 고요해지고
구름은 더 낮아질 거야
한 세계를 쉼 없이 걷던 신발 위로
무덤 같은 시간이 흐르면
항아리에서 잘 익은 술을 꺼내
두 개의 유리잔에 부어 마시자
그리고 둥근 식탁과 이야기하자
먼지가 되어버린 책에 대해
항상 우리 곁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시집, 백색어사전, 출판사 장롱
백색-나이테/ 임봄
저녁 무렵 낯선 바닷가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깨진 조개껍데기 같은 것
구름 사이 새가 할퀸 상처를 발견했을 때처럼
낯선 풍경 속 삶의 흉터에 눈이 가는 것
멀리 보이는 파도의 너울에 대고 가만히
어제 죽은 새의 행방을 묻는 것
파도에 밀려와 해변을 서성이는
한쩍 구두에 오래 안부를 전하는 것
내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동요를 흥얼거리는 것
바닷가를 가득 메운 검은 조약돌에서
숫자로 셀 수 없어 흘려보낸 것들을 떠올리는 것
일기예보 따위는 듣지 않아도 괜찮다고
마지막 차편 따위는 잊어도 괜찮다고
엄숙하게 입을 다문 이마 위 굵은 주름처럼
푸른 이빨을 부딪치며 다가오는 시간의 간격을 세는 것
수백 마리 오리 떼가
물의 나이테를 세며 내일을 잊은 것처럼
평온하게 흘러가는 물을
종일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 것
# 임봄 시인은 (본명 임효선) 1970년 경기도 평택 출생으로 고려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2009년 <애지>로 시 등단, 2013년 <시와사상>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백색어사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