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본말(本末) - 김유석

마루안 2018. 8. 20. 20:18



본말(本末) - 김유석



겨우 허리를 받쳐 드나 싶은 게 벌써 공중을 향해 나팔을 분다.
편안한 바닥을 두고 허공을 들추는 위태로운 습벽, 나팔꽃
마당에서 지붕 사이의 휘청거림을 당겨 철사줄 난간을 매어주었다.
단박에 내달을 듯 치오르다 멈칫, 꽃등 하나 켜달고 또 멈칫
허공은 저렇듯 건너는 것일까, 한치 앞을 배배 감아서 걷는다


늦매미 울음이 얽히고설킨 공중들이 자지러지는 처서 무렵
매었던 줄을 거두어들이면서
매던 길과 함께 생긴 벼랑을 문득, 본다.
철사 줄에 걸린 벼랑 위에서
아뜩 눈 감을 때마다 터지던 게 꽃이었다니


필 때와 질 때의 색깔이 다른 나팔꽃
어느 것이 길이었을까



*시집, 놀이의 방식, 문학의전당








꽃의 영지(領地) - 김유석



멀리서 보면 피어 있었고 가까이 다가서자 지고 있었다.
나비가 나풀거리는 그 중간쯤에서
나는 사실보다 픽션을 좋아하는 애인을 떠올렸다.


난 사실을 원치 않아요
난 마술을 원하죠*


내 애인은 간지러운 오럴(oral)을 즐긴다.
간지러우면 발갛게 달아오르는 애인의 봉오리에
나비처럼 입술을 비벼대면
간지럼을 참는 표정으로 피어나는 꽃들


사실보다 무엇이 사실이어야 하는지를 누설하듯,


좀약 냄새가 나는 애인의 꽃술에는
파충류의 이빨 자국 같은 게 박혀 있다.
나비가 앉았던 흔적이라 속삭이며
죽어가는 독사처럼 한 번 더 깊숙이 물어주면


무엇을 감추려 하는 것일까, 절정에 이르기 전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다녀오는 애인의 꽃밭에는
제 혀를 깨물고 죽은 꽃씨들이 너무도 많아
그러고 보면


간지럼을 참으면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는 나는
사실과 픽션 사이를 거느리는 애인의 영지에서
몇 번이나 죽었다 살아나는 나비이어야 하는지


얻게 되는 것은 원하는 것과 좀 다른 법이죠
차라리 달아날 곳을 찾아보지 그래요


낯선 이의 친절함 같은 봄날
재구성되는 아름다움에 홀려 지루하게 늙어가는 내게
최면을 걸고 죽은 나비의 기억을 빨아먹는


이상하다. 내 애인은 좀처럼 늙을 줄을 모른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